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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는 세상/이땅 곳곳

[공주여행] 백제의 왕성, 공산성 성곽길 걷기

낙엽 떨어진 현충사를 거쳐 지난밤 해질녁에 도착했기에 공산성을 금서루錦西樓의 야경으로 먼저 접한다.
기와의 처마선을 드리운 보라색이 주황색과 녹색으로 변신하며 공주시내를 밝히고 있는데 전망을 보기 위해 해가 졌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오른다.

공산성은 백제시대 웅진 도읍기(475~538)의 공주를 방어하기 위한 해발 110m의 왕성王城으로 금강변에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쌓아 천혜의 요새와 같다. 문주왕 원년에 한강유역(;한성)에서 공주(;웅진)로 천도, 성왕 16년에 부여(;사비)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 왕도王都를 지켰다.
총길이 2,260m로 동서남북에 네개의 문루門樓가 있고,백제시대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 조선시대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리며 활용되었다. 사적 제12호이며,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매표소에서는 매표(성인 ₩1,200)후 이틀 동안 공산성, 석장리박물관,송산리고분군을 둘러 볼 수 있는 통합 관람권(₩2,800)을 판매하니 일정이 된다면 구매하면 좋다.

에서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입구 오른쪽의 비석군群이다. 공주와 관련된 인물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들인데 공주시 곳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한데 모아 놓은 것으로 우의정,도순찰사,암행어사,목사, 군수 등 관리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을 새긴 송덕비와 제민천교橋 영세비 등 47기가 있다.

금서루에서는 백제왕성을 지켰던 수문병 근무교대식을 매년 4월부터 10월까지 재현한다고 한다.

어느새 해가 뜬 오른쪽으로 길을 향한다.
이른 아침의 새소리가 공주市를 깨우는데 밝은 햇살에 맞물려 싱그럽다.

햇빛 비치는 성곽길을 걸어 도착한 곳은 수정.
이괄의 난亂(1624)을 피하여 조선 인조가 공주로 파천播遷하여 6일간 머물렀는데 평정소식에 기뻐하며  자신이 기대었던 두 그루의 나무(雙樹)에 정3품 통훈대부通訓大夫라는 벼슬을 내리고, 이곳을 쌍수산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영조 10년(1734)에  관찰사 이수항이 쌍수가 있던 자리에 삼가정三架亭을 지은 것이 바로 쌍수정이며, 공주의 떡 인절미의 유래가 전한다.

쌍수정을 오르기 전 넓은 터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왕궁지址들을 본다.

공주 시가지와 금강, 송산리고분군이 조망되는 우월한 위치에 있는 왕궁지는 큰 건물터와 연못터 및 목곽 저장시설 등 각종 유물(연꽃무늬 수막새, 삼족토기, 그릇받침 등)이 발견되었다.(2016년 11월4일 현재 공사중)

다시 성곽길을 따라 걷는다.

금방 진남루(문화재자료 제48호)에 다다른다.
진남루는 공산성의 남문으로 시내에서 공산성으로 출입하는 정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삼남(;전라,경상,충청)의 관문이었는데 토성이었던 공산성을 조선초기에 석성으로 다시 쌓으면서 세운 문루로 그 뒤에도 여러차례 고쳐졌고 지금 있는 건물은 1971년에 전부 해체하여 원래대로 복원한 것이다.
높은 축대 위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건물을 세워 2층 누각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성곽길을 걷다 보면 노란 깃발을 많이 보게 되는데 모두 송산리 6호분 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재현한 것으로, 노랑은 백제의 나라색이며, 백제시대 사람들은 황색을 우주의 중심 되는 색으로 생각하여 중히 여겼다한다.
또한, 깃발의 테두리는 사신도의 각 동물이 상징하는 색을 반영하여,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 남쪽에는 주작,북쪽에는 현무를 각각 배치하였다.

다시 길을 떠나본다.
아, 가파르다.
하지만, 계단오르기는 건강에 좋다하고 어쩔 수 없이 가야하니 오른다.

헉헉거린 후, 이윽고, 영동루에 도착한다.

영동루는 공산성의 4개 성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으로 이미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80년에 발굴조사하여 건물 밑부분의 구조를 확인하였다.
문터 옆 양쪽에서는 원래의 문을 지탱하는 돌이 발견되었다.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公山誌의 기록(2층 3칸 건물)을 근거로 동문의 누각을 복원하였다.

영동루를 지나면 왼쪽 언덕배기에 광복루가 있다.

이곳은 공산성 동쪽 가장 높은 곳의 2층 누각으로 공산성 안에 주둔한 군대를 지휘하던 중군영中軍營의 문이었다. 원래 북문인 공북루 옆에 있던 것을 일제 강점기에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웅심각熊心閣으로 불렀는데, 1946년 4월에 김구선생과 이시영선생이 와서 나라를 다시 찾았음을 기리고자 "광복"이란 이름을 붙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복루 아랫길을 따라 걷다 보면 돌담이 아닌 가마로 덮인 길을 만나게 백제시대 토성의 흔적 467m를 그대로 둔 자리이다. 원점으로 회귀하게 길이 만들어져 있으므로 잠시 걸어 보자.

자칫 못 보고 지나칠 수 있는 임류각도 기억하자.
백제 제24대 동성왕이 세웠다는 임류각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500년(동성왕 22년)에 연못을 파고 기이한 금수를 길렀다"고 하고 '흐르는 금강물을 내려본다'는 뜻으로 '임류각'이란 이름을 붙였단다. 높이가 15m에 이르는 화려한 건물이었다고 하며, 무령왕릉의 유물 모양을 단청으로 활용하여 재현하였다.

임류각의 옆에는 정유재란 이듬해 1598년 왜군 방어를 위해 공주에 주둔했던 명나라 장수들, 이공,임제,남방위의 업적을 기리는 송덕비, 명국삼장비가 있다.

다시 성곽길을 걷는다.

확 트인 금강의 전경이 펼쳐지며 시원하게 한다.

금강을 굽어보며 잠시 쉬어간다.

누군가는 힘들게 올라올 나의 내리막.

길어만 보이는 길을 다 내려오면 공사중인 연지와 만하루가 보인다. 연지蓮池는 돌로 정연하게 쌓고 동서로 넓은 통로가 있으며, 깊이는 9m다.

물이 고인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길이 특이하건만 공사중이라...
(공사는 2016년 12월까지)

이곳은 영은사, 역시 공사중이다.

조선 세조 4년(1458)에 창건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묘은사로 불렸다가 이괄의 난 때 인조가 은적사라 하였다가 다시 영은사로 불렀다. 
영은사靈隱寺(문화재자료 제51호, 전통사찰 제2호)는 임진왜란때 승병의 훈련소로 사용되었다. 금산전투를 치른 승병들도 이곳에서 영규대사의 인솔 아래 훈련을 받았으며, 조선 광해군 8년(1616)때는 영은사에 승장僧將을 두어 8도의 사찰을 관리하게 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대웅전은 북향으로 세워져 금강을 향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에 면적이 19.5m² 되는 소규모 건물이다.
대웅전 안에는 목조 관음보살좌상(유형문화재 제160호), 아미타후불탱화(문화재자료 제 376호), 칠성탱화(문화재자료 제 377호), 신중탱화, 독성탱화, 산신탱화 및 숙종 41년(1715)  서산의 문수사文殊寺에서 제작된 청동범종(유형문화재 제161호)이 모셔져 있지만, 문이 닫혀 있어 볼 수 없었다.

영은사는 규모가 크지 않지만 성안의 오래된 사찰로 공산성과 역사를 함께 해 왔다. 영은사 경내에 있는 아래 사진의 원통전圓通殿(관세음보살의 다른 존칭)으로 불린다.

영은사 부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불상 6구가 출토되어 조선시대 이전애도 이곳에 사찰이 존재했음을 짐작케 하는데 백제시대부터 사찰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오르막을 또 올라 얼음창고에 도착.

내년 1월18일까지 이곳에 있었던 성안마을에 대한 문화유적 발굴조사를 한다.

공북루.
공산성의 북문으로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남북통로의 길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문루로 조선 선조 36년(1603) 옛 망북루터에 다시 지어 공북루라 불렀다.
문화재 발굴조사로 인해 정면에서 보기가 힘들지만 금강을 향해 확 트인 전망이다.

햇살은 따뜻하고 강바람은 시원하다.

공산성전망대가 보이는 내가 올라가야 할 길, 마지막 오르막이다.

오전부터 시작된 나의 성곽길 걷기(약1시간30분 소요)는 이제 끝이다.
 

시원한 바람이 부는 전망대에서 금서루와 금강을 바라보며 한가함을 만끽해본다.


※ 위 내용의 역사적 내용은 공주시 관광안내 자료와 방문지의 안내표지문을 참조하여 작성한 것이며, 모든 사진은 직접 촬영한 것으로 무단 사용을 금지합니다. ©somachoking

공산성 관광안내소 : 주차 무료
충남 공주시 웅진로 280(금성동 66-4)
Tel.041-856-7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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