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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ng Still

크라바트 Krabat

1646년, 30년 전쟁으로 황폐해진 독일.
전쟁과 굶주림으로 고통 받은 사람들은 또다시 흑사병과의 전쟁을 치러야만
했으니...

마을을 떠돌며 구걸로 연명하던 크라바트David Kross David Kroß 는 
'굶주림을 면하게 해준다'는 꿈을 꾸고는 함께하자던 친구들을 남겨둔 채,
까마귀가 이끄는 대로 따라 간다.
이윽고 도착한 방앗간에서 크라바트는 다른 소년들과 함께 도제가 되어 일만 열심히 하게 되지만 뭔가 알 수 없는 일들이 진행되는 것 같다.

부활절 밤, 크라바트는 수석도제 톤다Daniel Brühl와 함께 유체이탈을 경험하며 마을의 한 소녀를 알게 된다. 한편, 방앗간에서는 도제가 되기 위한 관문을 모두 통과하고 흑마법을 배우게 된다.

빨리 따라잡기 위해 스스로 노력도 하여 크라바트는 하늘을 나는 까마귀가 되기도 하는데...어느날, 마을을 약탈하러 온 군인들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톤다를 비롯한 모두는 마을로 가서 그들에 대항하여 싸워 이기지만 톤다는 워슐라Anna Thalbach를 보호하려다 마스터Christian Redl에게 들키고 만다.


며칠 후, 워슐라는 냇가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톤다는 마스터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되나
급격히 쇠약해진 마스터는 어느날 방앗간을 떠나는데 아무도 이유를 묻지 않는다.
섣달그믐날 밤, 무엇엔가에 의해 톤다는 죽임을 당하고 시신을 묻으러 가니 이미 묻을 곳이 파여 있어
크라바트는 묻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데 방앗간에는 다시 젊어진 마스터가 돌아와 있다.
한 소년이 죽으면 마스터는 다시 젊어진다는 얘기를 듣게 된 크라바트는 그날밤 도망치지만
밤을 새워 달렸으나 다시 방앗간으로 돌아오게 되어 자유로와 질 수 없음에 절망한다.

두번째 맞이하는 부활절 밤이 지나고 크라바트는 말더듬이 유라Hanno Koffler와 함께 자신을 단련한다.
마을로 간 크라바트는 칸토르카Paula Kalenberg를 다시 만나 방앗간을 벗어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마침내, 자유가 될 수 있는 섣달그믐날이 되었으나 크라바트는 방앗간을 벗어나지 않으려 하는데...
유라가 아닌 로슈코Robert Stadlober가 징표를 칸토카에게 전했고 그녀는 마스터에게 크라바트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마스터는 까마귀로 변한 소년들 중 크라바트를 찾으라 하는데
칸토카가 크라바트를 찾아내자 방앗간은 저절로 돌아가기 시작하며 불타게 되어 모두는 자유가 된다.

directed by Marco Kreuzpaintner
Based on the Novel "Krabat" by Otfried Preuβler  Erschienen im Thienemann Verlag 

안데르센상 수상작인 "오트프리트 프로이슬러"의 동화 <크라바트>를 영화로 만든 환타지.
13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2009)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출품작이고,
주인공 크라바트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에서의 그 어린 마이클.
해리포터 시리즈는 마법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고난극복이라는 변화감이나 있지만 
영화는 마법보다는 무조건적인 구속과 그에 따른 자유에의 갈망, 이성에 대한 동경에 맞춰져 재미 차원에서는 별루다.
게다가 내용전개는 사건 위주가 아닌 서술형식이라 더욱...

동화가 원작이니 위 줄거리를 대충 간략하게 추려보면,
굶주린 고아소년이 흑마법사의 방앗간에 가서 죽도록 일만 하다 흑마법을 배우지만
언젠가는 마스터의 젊음을 위해 희생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곳을 벗어나려 한다.
탈출도 시도하지만 허사이고, 누구를 믿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1년 중 유일하게 탈출할 수 있는 날인
섣달그믐날 밤, 자신을 찾으러 오는 소녀가 있으면 자유로와진다는 사실에 희망을 걸고 마침내 자유를 얻는다...정도~

잘 번역된 영어판 동화가 어쩌면 더 재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30년 전쟁[三十年戰爭, Thirty Years' War]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종교와 왕조, 영토 및 통상에서의 적대관계 등 다양한 이유로 벌인 전쟁(1618~48).

이 파괴적인 전쟁은 유럽 대륙 거의 전역에서 벌어졌으며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을 때 유럽의 지도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변모했다.

30년전쟁을 초래한 분쟁은 수년 정도 앞서 발생했지만 일반적으로 이 전쟁은 1618년에 시작된 것으로 본다.
1618년 장차의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2세보헤미아 왕의 자격으로 자신의 영토 내에서 가톨릭 절대 신앙을 강요하려고 하자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의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로마 가톨릭교).
페르디난트는 5년에 걸친 전투 끝에 승리했다.
1625년
덴마크크리스티안 4세는 이전에 스웨덴측에 발트 해 연안지방을 빼앗긴 손실을 상쇄하고자 점령 가치가 뛰어난 독일의 영토를 차지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다. 그러나 크리스티안 4세의 패배와 1629년의 뤼베크 평화조약으로 유럽 강국으로서의 덴마크 지위는 종말을 고했다.

한편 폴란드와의 4년에 걸친 전쟁을 마무리지은
스웨덴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독일을 침공, 독일의 여러 제후들을 자신이 표방한 반(反)가톨릭 및 반(反)신성 로마 제국 노선으로 끌어들였다(→ 개신교).
이러한 상황에서 여러 열강들의 정치적 야심으로 전쟁은 더욱 확대되었다.
발트 해 강국을 꿈꾸던
폴란드는 스웨덴과의 싸움이 무승부로 끝나자 러시아를 침공, 모스크바에 부아디수아프(나중에 폴란드 왕)를 정점으로 독재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자국의 야심을 펼쳐 나갔다.
1634년 폴란드와 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폴랴노프 평화조약은 폴란드의 러시아 왕위계승권 주장에 종지부를 찍었으나 폴란드로 하여금 발트 해 지역에서의 앙숙인 스웨덴과 맞서 다시 전쟁을 벌일 수 있게 해주었다.
당시 스웨덴은 독일의 혼란스런 상황에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유럽의 심장부에서는 가톨릭·프로테스탄트·칼뱅주의 등 3대 교파가 각축을 벌였다. 각 군주들과 고위 성직자들이 외세를 불러들임으로써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난맥상을 나타냈다.
전체적으로 싸움은 가톨릭과 합스부르크 왕가가 대표하는
신성 로마 제국을 한편으로 하고, 반(反)가톨릭 세력의 근간을 이룬 스웨덴과 네덜란드에 의지한 프로테스탄트 도시들 및 공국을 다른 한편으로 했다.
네덜란드는 80년간에 걸친 투쟁 끝에 마침내 스페인의 억압에서 벗어난 나라였다. 평행선을 이룬 분쟁에는 합스부르크 왕가 및 스페인에 대한 프랑스의 경쟁의식이 깔려 있었는데 스페인과 합스부르크 왕가는 반(反)프랑스 연합전선의 구축을 시도해오고 있었다.

계속해서 간헐적으로 벌어진 30년전쟁의 주요무대는 독일 도시와 공국이었으며 이 지역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전투에 참가한 많은 군인들이 용병이라는 점은 30년전쟁의 한 특징이다. 이들 용병 가운데 다수는 급료를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기 때문에 보급품 충당을 위해 시골마을을 약탈했으며 따라서 이 전쟁에서 하나의 전형을 이루는 이른바 '늑대 전략'이 시작되었다.

쌍방간의 군대는 모두 진군중에 약탈을 일삼아 도시와 마을 및 농장들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마침내 열강들이 유혈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독일의 베스트팔렌에서 회동했을 때 유럽의 세력균형은 근본적으로 변해 있었다
(→ 베스트팔렌 조약).
스페인은 네덜란드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서유럽에서의 주도적인 입지도 상실했다.
프랑스는 서방강국으로 부상했으며 스웨덴은 발트 해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네덜란드는 독립된 공화국으로 승인받았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소속 연방국가들에는 완전한 주권이 주어졌다.
따라서 정신적으로는 교황이 주도하고 세속적으로는 황제가 주도하는 유럽의 가톨릭 제국으로서의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또한 주권국가들의 공동체라는 근대 유럽의 본질적인 구조가 확립되었다.→
유럽의 역사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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