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 하던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설법을 듣게되고 이에 크게 감동,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면서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 하는 경기도 화성의 화산으로 옮겨와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아 절을 지어 현릉원의 능사(陵寺)로서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 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불렀고
그리하여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지게 되었다.
위치 :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 188 Tel. 031)234-0040
(이상 출처- http://www.yongjoosa.or.kr )
수원 화성행궁에 이은 정조대왕의 발자취를 좇다 경기도 화성의 화산 용주사(龍珠寺)를 찾았다.
더운 여름날, 시원한 나무그늘에서 쉬어 갈 요량이었으나 제대로 된 나무그늘은
매표소를 지난 절의 입구에 있었으니...(입장료 1500원은 좀 비싼 듯...)
대웅보전 앞 구름문양과 연꽃문양 |
대웅보전 앞 (태극모양) 구름문양 |
대웅보전 |
대웅보전의 하앙과 풍경 |
대웅보전의 뒷면 |
그래도, 맑은 날씨와 파란 하늘의 흰구름으로 위안 삼으며
다른 어떤 절집보다도 본래의 모습을 잘 간직한 용주사를 둘러 보았다.
수원화성에서도 볼 수 있었던 구름문양을 대웅보전 앞 계단에서 다시 볼 수 있었으며,
대웅보전의 닫집과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후불탱화는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고
1790년으로부터 219년을 이어온 내부의 색바랜 단청과 나무 이음새 또한 오랫동안 서서 감상하기에 아주 좋았다.
그런데, 가까운 곳이라 한번에 둘러보려 했던 융건릉은 월요일은 문을 열지 않아 발길을 돌려야 했다.
나무 우거진 숲길이 좋아보여 조용히 나무향 속에 빠지려 했는데...
몸과 마음이 맑은 날, 렌즈교환이 완료된 P80을 갖고 다시 찾아야겠다.
(위 모든 사진은 팬택 SKY IM-S315L로 촬영한 것이다.)
출처- 용주사 전각소개 http://www.yongjoosa.or.kr/
대웅보전의 삼존상 뒤에 위치하는 삼세불의 후불탱화입니다. 세로 440㎝, 가로 350㎝의 비단에 채색한 거대한 불화로 1790년 절의 창건과 함께 만들어졌습니다.
화면의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본존으로 그 오른쪽에 아미타불, 왼쪽에 약사불이 협시합니다. 아미타불과 약사불은 동일하게 원형으로 두광·신광을 나타냈고 석가모니불만은 주형(舟形)으로 처리하였습니다. 화면의 하단에는 석가모니불 아래에 제자 아난과 가섭이 수학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바로 밑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시립하고 있습니다.
아미타불 아래에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약사불 아래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각각 화려한 보관과 영락을 지니고 시립해 있고 하단의 좌우 가장자리에는 증장천왕(增長天王)과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숭엄한 부처님의 세계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한편 하단 중앙의 문수·보현보살 사이에 라는 은자서(銀字書)의 축원문이 적혀있어 후불탱화를 봉안함으로써 부처님의 가피가 왕실에 미치기를 기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상전하 수만세 (主上殿下 壽萬歲) | 자궁저하 수만세 (慈宮邸下 壽萬歲) |
왕비전하 수만세 (王妃殿下 壽萬歲) | 세자저하 수만세 (世子邸下 壽萬歲) |
화면의 상단 좌우 가장자리에는 지국천왕(持國天王)과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역시 불법을 수호하고 중앙의 석가모니불 두광 좌우에는 화불(化佛)이 보이고 곳곳에 여러 제자와 천녀상이 위치하여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불화는 원칙적으로 한치의 여백도 없이 꽉찬 구도를 묘사하는데 이는 불법의 세계가 법과 지혜로 충만된 완전의 공간이므로 이를 묘사한 불화는 마땅히 빈공간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불화의 전체적인 특징으로는 먼저 색조에 있어서 일반적인 불화의 주조색인 적색·녹색위주에서 벗어나 옅은 청색과 갈색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선의 처리는 다소 필력이 약하여 박진감과 생동감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조선시대 불화에서 흔히 나타나는 평면적, 도식적인 기법과는 거리가 멉니다. 과장없는 인체비례, 사실적인 얼굴표현, 침착한 설채법(設彩法) 등이 불화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데 무엇보다도 특이한 것은 인물이 표현에 음영법을 쓰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불화는 서양화법과 같은 원근법, 명암법 등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상례인데, 후불탱화의 인물표현에 음영을 나타냈다는 것은 불화를 그리는 전문적인 화승(畵僧)의 작품이 아니라 당시 서양화법의 영향을 받은 문인화가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말해줍니다.
불화의 제작자에 대해서 과거부터 김홍도라고 알려져 왔으나 최근에는 그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조성되었다는 이론도 있는데, 즉 대웅보전 닫집에서 발견된 원문(願文) 중의 "민관(旻寬)·상겸(尙謙)·성윤(性允) 등 25인이 탱화를 그렸다"라는 기록을 증거로 김홍도가 아니라 25인의 화승들에 의해 그려졌다는 것입니다만 이러한 이설에는 다소 무리가 따릅니다.
후불탱화의 제작자를 알 수 있는 또하나의 자료인 《본사제반서화조작등제인방함(本寺諸般書畵造作等諸人芳啣)》에는 '대웅보전보탑후불탱삼세여래체탱 화원 연풍현감김홍도(大雄寶殿寶榻後佛幀三世如來體幀花園延豊縣監金弘道)라고 분명히 적고 있습니다.먼저 대웅전 닫집 발견 원문은 1790년 10월7일 대웅보전에 삼세불을 봉안하고 그 시말을 적은 것인데 민관 등 25인이 탱화를 그렸다고만 했지 구체적인 제작의 과정은 생략하였고, 두번째의 자료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부모은중경 석판·동판이 봉안된 1802년 직후의 기록으로 추정됩니다. 내용은 각 전각의 도편수와 단청장, 탱화와 불상의 제작자 등을 자세하게 실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시대가 앞선 기록물이 중시되어야 하지만 여기서의 경우는 몇가지 점에서 뒤늦게 작성된 후자의 기록이 신빙성이 높다고 하겠는데 그 예로서 첫째, 제작에 참여한 인물과 화풍의 문제로 후불탱의 제작에 참여했던 상겸은 당시 정조대의 유명한 화승(畵僧)으로 이보다 앞선 1782년에 충남 예산 향천사(香泉寺)의 지장보살도를 그렸고, 1790년에는 용주사의 후불탱화와는 그 화풍이 전혀 다릅니다. 또한 상겸과 함께 후불탱의 제작에 참여한 민관이라는 스님은 1790년 용주사의 삼장탱화 조성자에도 그 이름이 들어있는데 지금도 삼장탱화는 잘 보존되어 있어 후불탱과 비교해볼 때 화풍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둘째, 김홍도의 작이라고 하는 것은 상기의 기록과 아울러 무엇보다도 후불탱이 지니고 있는 화풍이 그의 다른 도석인물화와 거의 같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미술사가 최완수(崔完秀) 선생의 말을 빌리면, 우선 탱화에 표현된 불보살 및 그 권속들의 얼굴표현이 바로 단원풍의 얼굴모습들이며 길쭉한 정도로 긴 윤곽에 우리 얼굴치고는 코가 너무 크다고 할 만큼 우뚝솟은 콧날을 가진 청수한 용모가 그것인데 이 얼굴 모습은 아마 단원 스스로의 용모이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유연하고 날렵하게 젖혀지는 손목의 표현이나 그에 비해 무미하다고 할 만큼 아무 변화없이 미끈하게 처리하는 팔뚝표현도 단원만이 가지는 인체표현의 특징이며 세장한 손가락과 고운 발 맵시 역시 단원 인물화에서 보이는 품위있는 표현법이다. 그리고 산들바람을 맞은 옷자락인 듯 유려하게 휘날리는 당풍세(當風勢)의 옷자락 표현이 또한 단원 인물화임을 증명해준다. (<月刊朝鮮> 1989년 7월호 pp. 575~576. 名刹순례 14. 수원 花山 龍珠寺)또한 후불탱의 은자서 축원문에 적혀있는 주상전하, 자궁전하, 왕비전하, 세자저하는 각각 정조와 생모인 혜경궁 홍씨, 왕비인 효의왕후 김씨, 왕세자였던 순조를 가리킨다고 하였습니다.
김홍도(1745~ ?)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화가중에서도 손꼽히는 인물로 진경산수(眞景山水),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풍속화 등 여러 방면에서 '단원법'이라 불리는 독창적 화풍을 이룩함으로써 한국화 발전에 커다란 획을 그었습니다. 29세인 1773년에는 영조의 어진(御眞)과 당시 왕세자였던 정조의 초상을 그렸고, 정조가 왕위에 오른 후인 1788년에는 왕명으로 금강산 등을 기행하며 그곳의 명승지를 그려 바쳤으며 용주사가 창건된 직후인 1791년에는 정조의 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릴 때도 참여해 그공으로 충청도 연풍현감에 임명, 정조에게서 "그림에 관한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관하게 했다."고 할 만큼 총애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정조대에 최고의 화가였고 또 왕의 총애를 받았던 김홍도가 용주사의 창건에 직접적으로 관여했음은 당연한 일이고,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옮기고 또 그 능사로써 용주사를 세우는데 당대 최고의 승려와 각종 기술자를 초빙하고 물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김홍도는 대웅보전 의 후불탱을 제작했고 1796년에는 《불설부모은중경판》의 변상도를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절에 소장되어 있는 4폭의 김홍도가 그린 병풍도 이 무렵에 왕에게서 하사된 것입니다.
이상에서 상기한 두 기록을 검토하고 몇가지의 고찰을 통해 후불탱의 제작자가 김홍도임을 알았고, 반면에 제작자를 민관 등 25인으로 적고있는 대웅전 닫집 발견 원문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남는데, 원문은 전체적으로 볼 때 위작의 가능성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므로 민관 등의 25인이 후불탱 제작에 어떠한 방법으로든 참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이는 후불탱의 규모가 거대하여 김홍도 혼자서 제작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거나 더욱이 그가 당시 최고의 화가이기는 했지만 불화를 그리는데는 경험이 부족했을 것이기 때문에, 정조의 명을 받은 김홍도가 밑그림(草本)과 기본적인 구도를 맡고 기타 채색이나 장식 등은 원문에서 밝힌 25인이 담당하였을 것입니다.
결국 용주사 대웅보전 후불탱은 왕명을 받은 김홍도의 주관 아래 민관·상겸·성윤 등의 25인이 참여하여 제작됐다고 하겠습니다. 끝으로 후불탱의 은자서 축원문은 사자관 글씨체인데 김홍도가 주관자였으므로 그가 직접 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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