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건릉, 심신의 안정을 주는 숲길
정조대왕의 효심 어린 장소이자 그가 묻힌 곳.
그렇게 단순하게 시작한 발걸음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날의 정오시간을 아주 풍성하게 만든다.
소나무, 잣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따라 산책로도 잘 만들어져 있고,
곳곳에 음수대가 있어 가족,연인이 자리 펴고 하루종일 솔향 맡으며 도란도란 보내기에 그만이다.
물론 계곡이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굳이 멀리까지 휴양림을 찾아 갈 필요가 없어 보인다.
융릉은 조선 제22대 정조正祖의 아버지인
사도세자 장조莊祖(1735-1762)와 그의 비인 헌경獻敬왕후(1735-1815) 홍씨가 묻힌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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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릉은 훗날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와 훗날 헌경의황후로 추존된 그의 비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다. 합장릉이면서 혼유석은 하나이다. 융릉은 세자의 묘인 원의 형식에 병풍석을 설치하고, 상계 공간과 하계 공간으로 나누어 공간을 왕릉처럼 조영하였다. 병풍석을 설치하였으나 난간석이 없으며, 병풍석 덮개의 12방위 연꽃 형의 조각은 융릉만의 독특한 형식이다. 상계에는 능침, 혼유석,망주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하계에는 문무인석, 석마가 배치되어 있다. 장명등의 8면에 조각된 매난국의 무늬는 매우 아름답다. 공간 구성 상의 특이점 중 또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정자각과 능침이 이루는 축이다. 대개의 왕릉에서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상에 축을 이루는 반면 융릉은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있다. 홍살문의 오른쪽에는 원형의 연못인 곤신지(坤申池)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풍수적 논리에 의해 조영되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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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년 5월 21일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숨진 장헌세자는 그해 7월 23일 현재의 동대문구 휘경동인 양주 배봉산 아래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한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사도’ 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호를 수은묘라고 하였다. 1776년 그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여, 아버지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수은묘를 원으로 격상시켜, 영우원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1789년(정조 13)에는 영우원을 현륭원으로 고치고 능을 현재의 위치로 천장하였다. 1815년(순조 15) 12월 15일에는 혜경궁 홍씨가 춘추 81세로 승하하여, 이듬해인 1816년(순조 16) 3월 3일 현륭원에 합장하였다. 1899년(광무 3) 11월 12일 고종은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여, 묘호를 장종으로 올리고, 능 이름을 융릉이라 했으며, 12월 19일에는 묘호를 장종에서 장조로 바꾸고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의황제라 했다. 경기도 양주군 남쪽 중랑포 배봉산에 있었으나, 정조가 즉위하면서 아버지의 존호를 장헌으로 올리고, 1789년 현재의 위치로 묘를 옮긴 후 능호를 융릉으로 바꿨다. |
출처 - 문화재청 융릉관리소 능이야기 중 발췌
건릉은 정조正祖(1776-1800, 재위 1752-1800)와 효의孝懿왕후(1753-1821) 김씨가 묻힌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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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릉은 정조와 효의왕후의 합장릉이다. 합장릉이지만 융릉과 같이 혼유석이 하나이다.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을 두른 차이를 제외하고는, 거의 융릉의 상설과 흡사하다. 기단부가 향로와 같은 형태로 8면에 둥근 원을 그려 매난국의 무늬를 팔면에 새긴 장명등도 융릉과 같다. 또한 등신대에 가까운 문석인과 무석인의 조각은 매우 사실적이며, 무석인은 금관조복을 입고 있다. 19세기 왕릉 석물 제도의 새로운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융릉과 건릉은 정조 때의 문운이 융성하던 기운과 양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능원 아래에 정자각이 있고, 정자각 동쪽에 비각이 세워져 있다. 6.25 당시 무너졌던 것을 1992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비각 안에는 1900년(광무 4) 고종이 어필로 ‘대한 정조선황제 건릉 효의선황후 부좌’라고 쓴 비석이 세워져 있다. 정자각 서쪽에 주춧돌만 있던자리에 2002년 수라간을 복원하여 세웠다. 그리고 정자각 남쪽 참도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으며, 융릉과 마찬가지로 참도 좌우에 정자각까지 박석을 깔아놓은 것이 다른 왕릉에 비하여 특이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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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6월 28일 정조가 49세로 승하하자 유언대로 같은 해 11월 6일 아버지의 능인 현륭원(훗날 융릉)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되었다. 그로부터 21년 후인 1821년(순조 21) 3월 9일 효의왕후가 승하하였다. 따라서 효의왕후를 건릉 부근에 안장하려고 하자 훗날 딸이 순조의 비 순원왕후가 됨으로써 영안부원군에 오르게 되는 영돈령부사 김조순이 현재의 건릉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으므로 길지를 찾아 천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길지를 물색한 결과 현륭원 서쪽의 산줄기를 찾아냈으며, 1821년(순조 21) 정조의 능을 현 위치인 현륭원 서쪽 언덕으로 이장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해서 오늘날의 건릉이 되었다. 효의왕후의 능호는 정릉이라고 하였다가 위와 같이 건릉으로 합장하게 됨에 따라 능호를 따로 쓰지 않게 되었다. 출처 - 문화재청 융릉관리소 능이야기 발췌 |
여기서도 역시 화성행궁, 용주사와 마찬가지인 구름문양과 연꽃문양을 본다.
융릉 정자각의 구름문양과 연꽃문양 |
건릉 정자각의 구름문양과 연꽃문양 |
융릉과 건릉의 정자각 어처구니를 보다 단청이 주는 맛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어느 절집이든 궁궐이든 새로이 칠한 단청은 보기엔 깔끔하고 좋지만
왠지 옛맛이 느껴지지 않아 작은 거부감이 있는게 솔직한 심정인데
건릉의 단청은 (조만간 새옷을 입어 버리고 말겠지만) 그야말로 세월에 흐려지고, 빛이 바랜 모습이라 무척 정겹다.
새로운 단청을 입힌 융릉 정자각 |
세월이 느껴지는 빛바랜 건릉 정자각 |
☞ http://pudding.paran.com/somachoking/10699389
2009년 6월, 조선왕릉 40기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소식에 반가움을 느끼며
앞으로도 더욱 잘 보존하고 가꾸어 나가기를 바래본다.
하지만, 사람들의 북적임을 조장할 테마파크는 왠지 거부감이...
(입장료는 성인 1천원이고, 유료주차장은 소형 2천원)
맵피 v571
아이나비SE v30(B320-MPN100)